[인물 History]/스포츠 인물

라면만 먹고 아시안 게임 육상 3관왕? 그거 뻥이에요!! - 라면소녀 임춘애 (Lim Chun Ae History)

미나미슈크 2024. 8. 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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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은행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육상을 시작. 같은 해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시면서 가난에 홀어머니 밑에서 위기가 찾아오지만, 뛰어난 재능과 끈기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운동에 임했으며, 그의 노력은 소년체전 및 전국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결실을 맺게 되고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사실, 임춘애는 아시안 게임의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었다. 그녀는 아시안게임을 5개월 앞두고 치러진 ‘아시안게임 육상 최종 선발전’에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 후에 열린 전국 체육대회에서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여고 3000m에서 종전 한국기록을 약 5초가량 단축한 9분21초69의 놀라운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이 기록은 아시안 게임에 동메달 이상을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임춘애는 3일 후에 치러진 10,000m와 1600m 계주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해 전국 체전 최우수 선수(MVP)로 뽑히게 된다.

이런 그녀를 본 대한육상연맹은 그녀의 아시안 게임 참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되는데 아무리 기록이 좋고 뛰어난 선수라도 아시안게임 대표 최종 선발전에 나오지 않은 선수를 아시안게임 대표로 뽑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임춘애는 비호기 육상경기 대회에 참가하여 1500m에서 4분 19초 85의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800m에서도 2분 7초 42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정상권 선수급임을 입증한다.

대한육상연맹은 고심 끝에 아시안게임을 2개월 여 앞둔 7월 30일, 이례적으로 임춘애를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하게 된다.

후에, 임춘애가 아시안 게임 선발전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는데... 경기도가 임춘애를 전국체전에 출전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시안게임 최종 예선에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

이에,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임춘애를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 내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기도 육상연맹 전무이사가 징계를 당하게 된다.

어찌됐든,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그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기록을 내게 되는데...

1986년 9월30일 오후 3시 잠실 메인스타디움.

임춘애는 자신의 취약종목인 800m에서 김번일 코치의 지시대로 중국선수는 잡았지만 아시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던 인도의 쿠리신칼에게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2위로 골인, 은메달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이변이 일어나는데...

쿠리신칼은 출발 이후 120m 지점을 지나야 자신의 코스를 벗어나 오픈 코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규정을 어기고

120m 지점 이전에 오픈 코스로 접어든 것이 적발된 것이다.

결국, 쿠리신칼의 금메달이 박탈되면서 은메달에 그친 임춘애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0m 레이스에서 세계최강 네덜란드의 크레이머가 금메달 기록으로 골인을 하고도 코스를 침범하는 바람에 실격을 당해 이승훈 선수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딴 것과 흡사한 경우다.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임춘애는 자신의 취약종목인 800m에서 금메달을 따자 주 종목인 1500m에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10월 3일 오후 2시 여자 1500m 결승전.

임춘애는 처음부터 자신 있는 레이스를 전개하면서 4분 21초 38의 기록으로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해 2관왕에 오르게 된다.

경기 후 그녀는 “800m에서는 다른 선수의 실수로 금메달을 땄지만, 1500m에서 내 실력으로 금메달을 차지해서 더욱 기뻐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2관왕에 오른 다음날인 10월 4일 오후 3시30분. 3000m에 출전하는 임춘애.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17세 한국 소녀가 800m와 1500m를 제패하고, 이제 3000m까지 석권 3관왕에 도전하는 모습에 아시아 전역은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임춘애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레이스를 펼치면서 처음부터 선두로 나서지 않고 선두권 선수들 바짝 뒤에서 달렸다.

임춘애는 중국 선수를 2900m 지점까지 뒤로 쫒아 가다가 골인 지점 100m 정도를 남겨 놓고 스퍼트, 결국 9분 11초 92라는 기록으로 골인하여 당당히 1위를 하게 된다.

이로써, 임춘애는 한국에서는 불모지라 여겼던 육상에서 800m, 1500m, 3000m 3관왕이라는 쾌거를 달성. 여자 육상의 영웅이 된다.

그녀가 영웅이 된데에는 3관왕도 있지만, 또 다른 신화가 있었는데...

임춘애를 아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라면만 먹고 3관왕이 됐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화는 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생 역전 스토리로 당시, 국민들의 정서를 파고 들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게 만들었고, 이에 더해 언론은 “그녀는 삼시 세 끼, 라면만 먹고 86 아시안 게임 중장거리 육상 3관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허나, 실상은 달랐다.

당시, 육상부 코치 김번일은 인터뷰에서 육상부의 열악한 지원에 간식으로 라면만 먹는다고 한 말을 취재기자가 왜곡하여 '육상부 선수들이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고 기사를 쓰면서 이 이야기가 일파만파 퍼지게 된것이다.

임춘애 역시 이부분에 대해서 '체력보강을 위해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다. 라면만 먹고 어떻게 뛰겠느냐?' 라며 해명했다.

후에, 그 기자가 왜 그런 왜곡 기사를 작성 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열악한 육상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좀 더 후원을 많이 받게 해주려고 인터뷰 내용을 심하게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한국 육상부 지원의 열악한 환경은 맞는 이야기이고, 그 와중에 임춘애가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남겼으니, 그녀는 영웅으로 불릴만한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영웅으로 칭송받게 된 그녀는 2년 후인 88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주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데... 이날은 더욱 뜻깊었던 것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함께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고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고, 그녀에게 86아시안 게임에서의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임춘애는 아시안게임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몸을 혹사시키면서 훈련했었다고 밝혔는데 그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아졌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잘못이 아닌 당시, 육상계의 학대와 비과학적인 훈련 방법이 원인으로 말 그대로 세계 수준에 비빌수 없는 체계였다.

결국, 임춘애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다 피로골절로 전격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후, 축구 선수 출신 이상용과 결혼한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지내다 2010년 성남시 소속의 학교 전문코치로

다시 육상계에 복귀하고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전히 한국 육상에 힘쓰고 있다.

헝그리 정신의 상징, 라면소녀로 불리며 한국 육상계에 한 획을 그었던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운이 좋아 3관왕을 했습니다." "하지만, 운이라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의 배경에는 피나는 노력이 밑바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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