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History]/연예계 인물

시티팝 열풍 한밤중의 도어 - Stay With Me. 살고 싶어했던 '마츠바라 미키'의 안타까운 비하인드 스토리 (Miki Matsubara History)

미나미슈크 2024. 8. 23.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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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전까지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과거의 게임, 음악 등이 사랑을 받았다. 특히 시티팝이라 불리는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일본 음악들은 틱톡, 유튜브 등의 영상매체에서 최근까지 많은 관심을 받고있는데 그 수많은 곡들 중에서도 유독 인기를 끌고 있는 곡이 있었으니...그 곡은 바로 <한밤중의 문 - Stay With Me>

 

도시적인 시티팝 사운드와 독특한 재즈풍 음색의 환상적인 보이스가 조화를 이뤄 세련된 분위기로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은 이 노래는 1979년에 데뷔한 '마츠바라 미키'의 첫 싱글 앨범이다.

<타고난 재능의 가수가 꿈인 소녀>

1959년 11월 28일 오사카부 기시와다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마츠바라 미키. 그녀는 병원의 경영진이었던 아버지와 재즈 가수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부럽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자연스레 음악과 친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적부터 부지런하고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마츠바라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다방면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으며 명문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주변에서는 그녀가 당연히 대학에 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츠바라는 대학이 아닌 다른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가수였다.

어릴 적부터 재즈 가수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록밴드 '구레이'에서 활동하였고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요시노야 밴드'에서 키보디스트로 교토의 라이브하우스인 '타쿠타쿠'에서 연주를 하며 꿈을 키워갔다.

그리고 1977년. 고교 3학년 때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홀로 도쿄로 상경해 문화대학 부속 스기나미 고등학교로 전학한 그녀는 라이브 카페 및 미군 캠프에서 연주활동을 했는데 그 중 롯본기의 재즈 스팟인 '버드랜드 (バードランド)'에서 그녀를 본

재즈피아니스트인 '세라 유즈루 (世良譲)'가 극찬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그녀는 피로누적과 정신적 불안이 겹쳐 졸업시험을 구두시문으로 볼 정도로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으나 다행히 수술을 받아 회복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1979년 11월 5일 <한밤중의 문 - Stay With Me>로 데뷔하게 된 마츠바라 미키

이 곡은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장르로 훗날 시티 팝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데 제작 당시의 곡명은 〈Stay with Me〉였지만, 우연히도 같은 해 6월에 사카이 마사아키의 〈STAY WITH ME〉가 발매되었기 때문에 〈한밤중의 문〉을 서둘러 추가해 <한밤중의 문 - Stay With Me>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매 된 앨범은 30만장가량 팔리면서 오리콘 차트 28위에 오르는 준수한 성적을 냈으며 이 곡을 작곡한 ‘하야시 테츠지’는 마츠바라를 "실제 나이보다 성숙하고 재즈적이며 섹시함까지 겸비해" "이 곡에 딱 맞는 가수"라고 칭찬했다고...

이 후 마츠바라는 이 곡을 데뷔 1년 후인 1980년 첫 정규 앨범인 <POCKET PARK>에 또 다시 수록했는데 싱글 버전은 인트로에 마츠바라의 목소리가 있지만, 앨범 버전은 인트로에서 마츠바라의 목소리가 빠졌고 마지막 코러스의 후렴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싱글 버전보다 연주 시간이 약간 더 길다는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이 곡은 미국 가수 겸 작사, 작곡가인 '캐롤 베이어 세이거(Carole Bayer Sager)'의 1978년작 <It's The Falling in Love>를 레퍼런스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부분에서 원작자한테 미리 허락을 구한 경우가 아닌 이상 표절이다"라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작곡가의 잘못이므로 당시 이곡을 받은 마츠바라는 이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평이 높다고...

상황이 어찌됐든 <한밤중의 문 - Stay With Me>는 당시 슈퍼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부를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마츠바라 미키는 제9회 도쿄 뮤직 페스티벌 국내 콩쿠르 신인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제7회 ABC송 신인상 그랑프리 심사위원 장려상, 제10회 긴자 뮤직 페스티벌 열정상, 제7회 요코하마 음악제 신인상 제4회 FM 오사카 카시로 팬클럽 신인상 특별상)

이 후, 정규 3집까지 꾸준히 오리콘 차트 20위권을 유지. 3집 수록곡 중 '니트한 오후 3시(ニートな午後3時)'란 곡이 시세이도의 광고에 쓰이는 등 나름 준수한 성적을 냈으나 정규 4집이 기대와는 달리 오리콘 차트 68위에 오르며 저조한 성적을 내게 되는데... 이에 대해 데뷔곡과 같은 신선함을 원했던 대중들의 기대에 못미쳤다는 평이 있다.

그 후 정규 5집은 차트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고, 정규 6집은 오리콘 차트 73위, 이어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7집 이 후 그녀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25살즈음 되니 주변에서 하나 둘 가수를 그만둔다" "이에 너무 힘들지만"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매력을 뽐낼 수 있길 바란다" 라며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버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1988년에 낸 마지막 앨범인 정규 9집까지 끝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가수로서 한계를 느끼고 만다.

결국, 1990년대에 결혼을 한 후 가수로서가 아닌 작곡가 및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르며 활동을 하게 되는데 국내에서 알만한 작품으로 기동전사 건담 0083 (THE WINNER), 더티 페어 더 무비 (OP,ED) 등이 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0년대.

어느덧 대중들의 기억에서 그녀의 존재가 희미해져 갈 즈음 마츠바라는 소속사와 지인들에게 돌연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음악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전화, 핸드폰, 이메일 다 취소했으니 연락 하지 마시오" 라며 일방적인 통보를 하는데...

이에 놀란 지인들이 곧바로 연락을 취했으나 그 누구도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다시 흘러 2004년 12월 사람들은 그동안 두문불출했던 그녀의 소식을 뜻밖에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데...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마츠바라의 부고 소식이었다. 사망 원인은 '자궁경부암'으로 마츠바라가 세상을 떠난 지 2달이 지나서야 신문을 통해 그녀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마츠바라의 갑작스런 잠적과 죽음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였는데...

평소 사생활에 대해서는 공개하기를 꺼려했던 마츠바라는 자신이 자궁경부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가 언제부터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대중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고서야 잠적 후 3년간 힘겨웠던 투병생활을 가족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마츠바라는 자신의 악보와 레코드를 불태우며 "내가 노래하고 작곡하던 시절은 잊어" "그 생활이 나에게 병을 가져오게 한것 같아" "그래서 모든 것을 리셋한거야" "나는 많은 것을 하고 싶어. 그래서 죽고 싶지 않아"라며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을 포기하면서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본인의 병이 화려한 데뷔 이 후 계속되는 하락세에 스트레스를 받아 생긴 것이라 생각되어 지금까지 올인했던 음악활동에 대한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작 고통으로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음악을 중얼거렸다는데... 이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본 아버지는 마츠바라의 진심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계속해서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마츠바라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2004년 10월 7일 그녀는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렇게 마츠바라 미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음악은 세월이 흘러 2010년대 시티팝의 유행과 함께 재조명을 받으면서 미국 Apple Music TOP 100안에 들었고 김재중, 나카모리 아키나, 넬슨 바빈 코이, 레이니치 등 세계 각국의 유명인들이 커버를 했으며 2023년 현재까지 유튜브 및 틱톡에서 일본 시티팝을 대표하는 곡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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